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오브제 그리고 그날, 그곳의 날씨가 영감이 됩니다.


처음 만난 작은 브랜드에 지갑을 열어 적잖은 값을 치릅니다.

그리고 ‘기대치에 대한 만족 정도’를 리뷰로 표현합니다.

DM으로는 조금 더 친밀한 응원을 받습니다.


이럴 때면 우리 제품에 대한 의심의 안개가 한 꺼풀 옅어집니다.

이 틈을 노려 아쉬웠던 패턴을 티 안 나게 살짝 고쳐보고, 마진을 연료 삼아 아쉬웠던 바느질의 땀수도 높여 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어느새 의심의 안개가 소독차 연기 내뿜 듯 뿌아앙 밀려옵니다. 녹사평역 육교에서 남산타워가 보이지 않을 만큼 짙어집니다.


짙은 안개는 좁디좁은 길마저 흐릿하게 합니다.

갈 길은 먼데 발끝으로 디딜 땅을 열 대번 디딘 다음 겨우 한 발짝 내딛습니다.

’너무 무서운데 조금만 되돌아가 볼까?’

뒤를 돌아봤자 걸어온 길은 빼박이라는 모래바람에 휩쓸려 흔적조차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은 브랜드, 단단해 보이고 싶지만 마냥 허약합니다.

성장이 더디고 벌써 성장이 끝나버린 나이가 되었나 싶어 초조합니다.

나약함이 탈로 날까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쁩니다.


주문이 들어옵니다.

택배 상자에 송장을 붙이며 의심을 물리치는 주문을 외웁니다.

’명심해. 넌 정말 멋지고 좋은 옷이야.’


하지만 여전히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을 테고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더디겠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나누면 뿌연 마음에 미약한 빛이 비치고 연약한 바람이 붑니다. 


누구나 자신을 의심하며 삽니다.

어쩌면 다행입니다.

근거 없는 자기 확신만큼 무서운 것은 또 없으니까요.


샬롬


하늘은 맑았고 눈앞은 흐릿했으며 햇빛 속 사람들은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우리의 결정은 건강하고 정당하고 마땅하다.
이제 우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짧은 봄을 만끽하자.


“조카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큰 고모부가 보내온 문자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통화 버튼을 눌러야 했는데 마음이 단단하지 못해 그냥 내려놨다.

문장의 뜻이 너무 까마득했고 내 몸은 멀리 있었다.


한참을 해변에 앉아 오고 가는 파도를 바라봤다.

할머니와 나눈 수많은 기억이 파도에 실려 온다.

어떤 기억에서 가슴이 세게 눌리며 쪼였다.

꽉 깨문 이 사이로 막힌 울음이 세어 나왔다.


한번 길을 낸 울음은 원활하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팡팡 털며 사탕 뺏긴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내 몸이 내는 울음소리와 뜻 모를 언어들의 수군거림에 귓속이 먹먹했다.

눈물에 번져 보이는 옥색 바다와 하얀 파라솔이 찬란하고 예뻤다.

언제 또 여길 와보나 세속적인 생각이 들어 뻔한 풍경 사진을 몇장 찍었다.


9월 더운 대낮, 지중해 해변에서 듣는 할머니의 부고 소식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영화의 한장면 같다.



나는 할머니에게 걷고 서는 법을 배웠고 말투를 배웠다.

밥을 먹고 치우는 습관을 배웠다.

할머니의 말투와 식성과 몸짓이 내 몸에 스며 들어 있다.


친절하라. 성실하라. 웃어라. 돈 벌고 모아라. 도덕을 지키라 가르치셨다.

안타깝지만 겨우 흉내만 내는 사람이 됐다.

당신을 반에 반도 닮지 못한 손주는 면목이 없다.



오래된 금반지 하나와 가느다란 목걸이 하나. 숏커트, 주름치마, 삼베 모시.

치장 없이 수수하지만 곧은 자세와 낮은 목소리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우아한 여성이셨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을 때는 청년들의 수고를 걱정하는 어른이었고, 폐지를 줍는 또래의 어른들을 사귀며 일손을 보태고 밥을 나누는 좋은 이웃이었다.


나이가 앞설수록 생각도 앞서야 한다며 뉴스를 꼬박 챙기셨고 저녁 밥상을 차려 주시며 손주에게 전한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셔서 늘상 라디오를 켜고 생활하셨고, 주말에는 다 큰 손주의 속옷을 삶아 빨며 개운해 하셨다.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의 고집은 조용하지만 힘이 있어 항상 한 끗 차이로 내가 졌다.


몸이 아파 일찍 떠난 야속한 남편과 자신의 것을 진즉에 다 퍼주어 물질이 넉넉한 삶은 아니셨다.

가진 것 하나 없음에도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해 오래 일을 하셨다.

그래서 주름이 깊고 손 마디가 거칠었다. 눈이 침침하여 오래 고생하셨다.



늘 사랑만 받아온 손주는 당신의 임종도 입관도 지키지 못하고 장례 마지막 날에서야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

식구들이 장례 일정을 4일장으로 변경하고 나를 기다렸다.

모두가 하루를 더 슬퍼해주며 자리를 비운 장손의 사정을 조문객들에게 변호했다.

우리가 아닌 할머니가 손주를 기다린 거라며,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오히려 민망하고 염치없는 나를 배려한다.

고맙다.



땅콩 크림 같은 땅속으로 할매의 작고 곧은 몸이 뉘인다.

일꾼들의 손이 야무지지 못해 마음을 졸였다.

나는 세 번 흙을 뿌린다.
퍼석한 흙이 관에 닿는 소리가 새의 날갯짓 소리처럼 들렸다.

땅을 덮는 소리에서 땅을 박차고 나는 소리가 났다.


포크레인의 육중한 삽이 흙을 꾹꾹 누를 땐 내 가슴이 눌린 듯 숨이 막혔다.

너무 빈틈이 없으면 할머니의 숨도 갑갑할까 육신의 틀에 갇힌 손주는 두려움이 사무친 울음을 꺽꺽였다.


할머니가 시집와 살던 마을 뒤편 선산은 볕이 좋고 울창하다.

다만 도로와 가까워 산을 끼고도는 차들의 부대낌이 시끄러워 걱정이고, 때를 입힌 봉분을 확인하지 못해 식구들 모두 석연치 않다.


때가 부디 우리 할머니처럼 아담하고 소박하게 잘 자라 주어 후대의 수고를 덜어 주었으면 한다.

그 남자는 언제부터 실격처리 되었을까.
스스로 실격이라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풍족한 삶은 축복이지만 그 환경을 누릴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가진다.
그 숙제를 풀지 못한 남자는 이름이 흐릿해 지며 여러개로 갈린다.

축축하고 고립된 그곳, Hinterland

폐가에서 만난 솜이불 처럼 불길한 기운의 안개에 돌돌 말려 있는 대지는 속을 알 수 없다. 그 대지를 터전 삼아 사는 인간들의 삶은 오한 걸린 듯 쑤시고 열이 난다. 그 땅은 자신의 품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하찮게 여긴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광활한 대지의 매력이 힌터랜드에 가득 펼쳐진다. 해풍으로 묵직해진 공기의 밀도와 신문지를 태우고 남은 재를 발라 놓은 하늘이 동공의 지름을 키우며 몰입하게 한다.


북산 베스트 파이브 중 가장 세련된(패션)된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가(송태섭/미야기 료타) 간토 지역이 아닌 오키나와 태생이라는 것이 꽤나 신선하다. 아픈 과거를 가졌음에도 어떤 캐릭터 보다 당당하고 구김 없어 보이는 이유. 세상을 떠난 형이 남긴 마지막 말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코트 위에 섰기 때문이겠지 🏀

어떤 준비도 없이 눈이 번쩍 떠진다. 목뒤 근육이 확 당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미 원망의 욕지기를 장전하고 휴대폰을 들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다. 안도감과 피곤이 동시에 밀려온다. 밤새 시달리다 제모습을 찾은 팡팡 한 베개에 다시 한번 헝클어진 머리를 올린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그런 아침이다. 곤두선 알람이 울릴 때까지 잠들지 않기 위해 생각들을 끄집어 낸다. 날씨는 어떨까? 얼마나 추울까? 지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뭐 입지?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 틈에 잠이란 녀석이 마취총을 들고 잠복해 있다. 제시간에 울린 알람은 결국 듣지 못한다. 한참 지각이다.

모두가 예찬하는 '한 여름 밤 시원한 맥주' 맛을 나는 잘 모른다. 술이 만들어주는 무드를 좋아할 뿐 마시고 맛을 느낀다 라는 의미로써 술은 그저 쓰디쓴 액체일 뿐이다. 하지만 인생 첫 해외여행에서 만난 싱하의 맛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혼술을 흉내낼때는 싱하를 찾는다. 방콕의 밤은 싱하의 향수로 가득하다.


해가 63빌딩 뒤로 숨은 한강 철교를 오랜만에 건넌다. 지하철의 진동 탓인지 회색 섞인 옅은 노을의 끄트머리가 오한 들린 듯 벌벌 떨린다. 나에겐 늘 무섭고 무겁고 무정한 한강은 살얼음 때문인지 더욱더 차갑고 냉정한 얼굴이다.

어릴적 단행본을 소장하고 있던 친구가 너무나 부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가진 것은 단순히 그림책이 아닌 권력이었다. 콘텐츠를 가진자가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 나는 늦게나마 가져보지 못한 그 권력을 손해 쥐어 본다. 때를 놓친 권력은 소망이 되고 그 소망들을 하나 둘 성취하며 우리는 어른이 된다.


시각적 여백은 반드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사고의 빈그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라보는 이에게 채우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디자인.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어도 될성 싶은 균형 잡힌 여백의 미.

흠없이 잘 깨진 호두를 보자니 비슷하지만 결코 똑같은 것이 없는 사람의 지문이 떠오른다. 딱딱한 머리뼈 속에 들어 앉은 나의 뇌 같기도 하다.

고소하고 쌉싸름한 호두를 씹으며 동경하던 인물들을 떠올린다. 스타일 뮤즈, 디자인 뮤즈, 지식의 뮤즈, 부와 권력의 뮤즈 등등
그들의 센스가 내 엄지에도 아로 새겨지길, 그들의 뇌주름이 나의 뇌에도 새겨지는 허황된 상상을 해본다.

운동은 직접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중 야구를 자주 본다. 시즌이면 월요일 또는 우천 취소를 제외하고 매일 경기를 한다. 그 지속성은 자연스레 일상의 루틴을 만들게 한다. 경기 중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다양한 소식이 쏟아져 나온다. 챙겨볼게 많다.

무언가를 꾸준히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는 것은 애정이다. 오래 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어느 시인이 썼다. 애정 한다는 것은 감정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팀의 결과에 따라 감정기복이 생긴다.

나는 두산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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